※ 다시 찾아보고 싶을 구절을 기록하였습니다. 본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책을 우선 완독 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목차
『이끼숲』 발췌
바다눈
유오가 거수경례 자세를 취했다. 마르코도 따라 오른손을 올렸다. 이마에서 손을 뗄 때는 가볍고 산뜻하게.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27쪽.
톨가의 표정은 황홀한 꿈을 꾸는 듯했다. 그런 톨가의 얼굴이 마르코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톨가는 뭐랄까, 마르코가 갈 수 없는 차원 속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차원은 톨가에게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짊어주었다.
행복과 책임감은 같은 수레를 타고 있다던 의주의 말이 떠올랐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수레는 레일에서 이탈하거나 뒤집혀. 책임감 없는 행복은 위험하고, 행복 없는 책임감은 고통스러운 거야.'
의주는 종종 이런 식으로, 행복 없는 책임감을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마르코는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톨가의 표정은 행복과 책임감이 적절히 섞인 수레처럼 만족스러워 보였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37쪽.
마르코는 제작실에서 처음 은희의 노랫소리를 들었던 순간부터 함께 점심을 먹었던 것, 그리고 어제 잠들기 전까지 은희를, 그리고 은희의 노랫소리를 떠올렸던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은희의 이야기를 톨가에게 하는 동안 마르코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후련함이었고 하나는 단단해짐이었다. 은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있던 은희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그 자리에 더 단단한 은희가 들어찼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쪼그라들며 단단한 광물처럼 빛났다.
줄곧 듣기만 하던 톨가는 마르코의 마음을 이렇게 정리했다.
"너 그 사람의 목소리에 흠뻑 빠졌구나! 그 목소리를 사랑하는 거야. 상대방이 가진 만 가지의 특징 중에서 단 하나의 특징이 마음에 쏙 들어오면, 사랑이 시작되는 거 같아. 나는 그 형이 문장 끝에 마침표를 잘 찍는 게 그렇게 좋았어. 다른 사람들은 그 말투가 딱딱해서 정이 안 간다고 하던데, 나는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 같아서 좋았거든."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39쪽.
'네 노래를 듣고 싶어.'
곱씹을수록 투박하고 직설적이었다. 톨가는 뭐든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게 좋다고 했는데, 그것이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방법이라고 했는데 마르코의 말은 장난감을 사달라는 아이처럼 솔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던진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41쪽.
톨가는 마르코의 손톱을 깔끔하게 잘라주고, 밤을 큐티클 부위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톨가는 이런 게 중요하다고 했다. 호감을 느끼는 건 한순간이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엄청나게 사소한 기준을 여러 차례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더러운 손톱 때문에 청결에 직결되는 부분에서 탈락하면 전망이 좋지 않다고 했다. 마르코는 손톱이 반듯하게 잘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B45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45쪽.
"바다눈이라는 건, 커다란 바다 생물의 사체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나 미생물이 눈처럼 내려서 붙여진 이름이야. 죽음의 잔해라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먹는 건 고래의 똥?"
은희는 그렇게 말하고 짓궂게 웃으며 멀어졌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음료를 마시며 웃었는데, 형형색색의 미러볼 조명이 은희의 얼굴에 잔뜩 내려앉아 은희는 그 자체로 우주 같았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50쪽.
훗날 마르코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누워 스페이스 스카이를 바라보던 밤, 은희의 노래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고래의 울음 같았어. 영상 자료실에서 혹등고래 울음을 들은 적이 있는데, 꼭 그 소리 같았어. 대답해주는 고래가 근처에 없는데, 혼자 계속 우는.'
그날 마르코가 바라보던 스페이스 스카이의 밤하늘은 컴컴한 심해 같았고, 빛나는 별은 잘게 부서진 은희의 목소리 같았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53쪽.
우주숲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고작 그까짓 게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감정들이 비선형적으로 마구 번져나가. 주체가 안 돼. 그러니까 이 방법은 아주 가끔 써.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하진 너는 증오가 뭔지 모를 수도 있겠다. 비꼬는 건 아니고, 너는 원래 감정의 폭이 크지 않잖아.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105쪽.
이끼늪
디에고는 지상 여행을 꿈꿀 정도로 허무맹랑하고, 동시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지상을 여행할 수 있다는 소문을 믿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었다는 뜻도 된다.
- 천선란, 『이끼숲』, (주)자이언트북스, 2023년, 142쪽.
『이끼숲』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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